1971년 미국이 달러와 금의 교환을 중단하면서 금본위제를 중심으로 한 국제통화질서는 사실상 막을 내렸습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한 가지 의문이 생깁니다.
금이 더 이상 화폐의 기준이 아니라면 중앙은행은 왜 지금도 금을 사들일까요?
더 흥미로운 것은 최근의 움직임입니다.
중앙은행들은 금본위제가 사라진 이후 오랫동안 금을 매도하기도 했지만,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거치면서 태도가 달라졌습니다. 2010년 이후 중앙은행은 연간 기준으로 순매수 세력으로 전환했고, 2022~2024년에는 매년 1,000톤을 넘는 금을 사들였습니다. 2025년에도 순매수량은 863.3톤으로 장기 평균을 크게 웃돌았습니다.
그리고 2026년에도 이 흐름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금본위제가 사라진 뒤 오히려 금의 전략적 가치가 다시 부각되고 있는 것입니다.
금본위제가 사라진 뒤 중앙은행은 한때 금을 팔았다
먼저 역사적 흐름부터 볼 필요가 있습니다.
1970년대 이후 세계는 금과 직접 연결되지 않는 불환화폐(Fiat Money) 체제로 이동했습니다.
불환화폐란 금이나 은 같은 실물자산으로 교환해 줄 것을 약속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중앙은행의 제도와 신뢰를 바탕으로 가치를 유지하는 화폐를 말합니다.
따라서 금을 반드시 보유해야 할 필요성도 과거보다 크게 줄었습니다.
실제로 1990년대와 2000년대에는 특히 서방 중앙은행을 중심으로 상당량의 금을 매각하는 움직임이 있었습니다. 세계금협회(World Gold Council)에 따르면 금본위제와 브레턴우즈 체제가 무너진 이후 일부 중앙은행들은 보유하고 있던 대규모 금을 줄이려 했습니다.
그런데 분위기가 바뀌기 시작한 계기가 있었습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입니다.
금융시스템 자체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면서 중앙은행 입장에서 금의 의미가 다시 부각되기 시작했습니다.
2010년부터 중앙은행은 연간 기준으로 금 순매수자가 됐습니다.
중앙은행 금 수요의 변화
중앙은행 금 순매수 추이
세계금협회 자료를 바탕으로 주요 연도의 중앙은행 금 순매수량 변화를 보여줍니다.

2010~2024년 수치는 World Gold Council 자료의 연간 순매수량을 사용한 차트입니다.
수치가 보여주는 변화는 상당히 뚜렷합니다.
2010~2021년 중앙은행의 연평균 금 순매수는 약 473톤이었지만, 2022년 이후에는 매입 규모가 크게 증가했습니다. 2025년 매입량은 2022~2024년의 1,000톤 이상보다는 감소했지만 여전히 장기 평균을 크게 웃돕니다.
그렇다면 중앙은행들은 금을 왜 사는 것일까요?
첫 번째 이유는 ‘달러 하나에만 의존하지 않기 위해서’다
중앙은행이 보유한 외환보유액에는 여러 자산이 들어갑니다.
대표적인 것이 미국 국채와 같은 달러 표시 자산입니다.
달러는 여전히 국제 금융시장에서 매우 중요한 준비통화이지만, 외환보유액을 특정 통화나 국가의 자산에 지나치게 집중시키면 그 국가의 금융·통화정책이나 지정학적 변화에 영향을 받을 가능성이 커집니다.
그래서 중앙은행 입장에서는 준비자산의 분산이 중요합니다.
금은 이 과정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합니다.
금에는 채권처럼 특정 국가나 기업이 원금을 갚아야 하는 의무가 없습니다.
즉,
미국 국채 → 미국 정부의 채무
회사채 → 기업의 채무
와 달리,
금 → 발행 주체가 없는 실물자산
이라는 차이가 있습니다.
국제통화기금(IMF)도 금이 신용위험과 거래상대방 위험(counterparty risk)을 갖지 않는다는 점을 중앙은행 준비자산으로서의 중요한 특징으로 설명합니다.
2025년 세계금협회 중앙은행 조사에서도 응답자의 76%가 향후 5년 동안 세계 외환보유액에서 금의 비중이 높아질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그리고 2026년 조사에서는 이 비율이 83%까지 올라갔습니다.
즉 중앙은행들이 금을 바라보는 관점은 단순히
“금값이 오를 것 같아서 산다.”
라기보다는,
“준비자산을 한쪽에 지나치게 집중하지 않겠다.”
에 더 가깝습니다.
두 번째 이유는 금에는 ‘발행자가 없다’는 점이다
이 부분이 중앙은행 입장에서 금의 가장 독특한 특징 중 하나입니다.
달러를 보유한다는 것은 결국 달러라는 통화와 미국 금융시스템에 연결되는 것입니다.
국채 역시 발행자의 신용과 금융시스템을 전제로 합니다.
하지만 금 자체에는 발행자가 없습니다.
누군가에게
“이 금의 원금을 돌려달라.”
고 요구할 필요도 없습니다.
금은 그냥 금입니다.
이 때문에 금은 중앙은행 입장에서 신용위험이 없는 자산으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것이 금에 위험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금값 자체가 크게 움직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IMF의 2026년 분석에서도 금은 신용위험이 없다는 장점이 있지만 가격 변동성이 크고, 모든 위기 상황에서 항상 안전자산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합니다.
따라서 정확하게 표현하면,
금은 위험이 없는 자산이 아니라 ‘신용·거래상대방 위험이 없는 자산’에 가깝습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 번째 이유는 위기 상황에서 금의 역할 때문이다
중앙은행이 금을 보유하는 이유를 조사하면 반복해서 등장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바로 위기(Crisis)입니다.
세계금협회가 2026년 중앙은행 금 보유량 조사에서 발표한 결과를 보면 응답자의 90%가 위기 상황에서 금의 성과를 금 보유 이유로 중요하게 평가했습니다.
장기적인 가치저장 수단은 84%, 포트폴리오 분산은 82%였습니다.
2025년 조사에서도 위기 상황에서의 성과, 분산효과, 가치저장 기능이 주요 이유로 꼽혔습니다.
이를 쉽게 표현하면 중앙은행에게 금은
평상시에 가장 높은 수익을 내기 위한 자산이라기보다, 예상하기 어려운 상황에 대비해 보유하는 자산
에 가깝습니다.
전쟁, 금융위기, 인플레이션, 국제적인 금융제재 등은 미리 정확하게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중앙은행은 준비자산의 일부를 특정 국가의 통화나 금융자산과 다른 성격을 가진 금으로 분산시킬 수 있습니다.
특히 최근에는 지정학적 위험(Geopolitical Risk)도 중요해졌습니다.
2026년 세계금협회 조사에서는 신흥국 및 개발도상국 중앙은행 응답자의 85%가 금의 지정학적 위험 헤지 기능을 중요한 요소로 평가했습니다.
중앙은행이 금을 사면 금값은 무조건 오를까?
여기서 투자자들이 가장 궁금해할 만한 부분입니다.
“중앙은행이 금을 많이 사니까 금값이 계속 올라가는 것 아닌가?”
절반은 맞지만, 그렇게 단순하게 볼 수는 없습니다.
중앙은행은 분명 중요한 금 수요처입니다.
실제로 2022~2024년에는 매년 1,000톤을 넘는 순매수가 이어졌고, 2025년에도 863톤을 매입했습니다.
하지만 금 가격은 중앙은행 매입만으로 결정되지 않습니다.
금 가격에는
- 미국 금리와 실질금리
- 달러 가치
- 투자 수요
- ETF 자금 흐름
- 지정학적 위험
- 인플레이션 기대
- 중국·인도 등의 실물 수요
- 금광 생산량과 재활용
등 여러 요인이 동시에 영향을 미칩니다.
따라서 “중앙은행이 금을 산다 → 금값이 반드시 오른다”라고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더 정확한 표현은,
중앙은행의 지속적인 금 매입이 금 시장의 구조적인 수요 기반 가운데 하나가 되고 있다
정도입니다.
실제로 2026년 1분기에도 중앙은행 순매수는 243.7톤으로 집계됐습니다. 폴란드와 우즈베키스탄 등이 주요 매수국이었고, 중국 인민은행도 금 보유량을 늘렸습니다.
그렇다면 중앙은행의 금 매입은 앞으로도 계속될까?
최근 자료를 보면 중앙은행의 금 선호가 단기간에 끝날 것이라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2026년 세계금협회 조사에서 89%의 중앙은행 준비자산 관리자들이 향후 12개월 동안 전 세계 중앙은행의 금 보유량이 증가할 것으로 예상했습니다.
또한 자신의 기관이 향후 12개월 동안 금 보유량을 늘릴 것이라고 답한 비율도 45%로 조사 이래 가장 높은 수준이었습니다.
다만 여기에도 중요한 단서가 있습니다.
중앙은행은 개인 투자자처럼 단순히 가격 상승을 기대하고 단기 매매를 하는 주체가 아닙니다.
IMF의 2026년 분석에서도 중앙은행의 금 보유 확대에는 기존 보유분의 가치 상승 효과가 상당 부분 포함되어 있으며, 금 보유량 자체가 같은 비율로 증가한 것은 아니라고 설명합니다. 2018~2025년 중앙은행 금 보유액의 시장가치는 약 1.2조 달러에서 4.5조 달러로 약 3.2조 달러 증가했지만, 실제 보유량 증가는 약 8.5%였습니다.
즉,
“중앙은행이 금을 많이 샀다”
와
“중앙은행의 금 보유 가치가 크게 증가했다”
는 서로 다른 이야기입니다.
금본위제는 끝났지만 금의 역할은 끝나지 않았다
1971년 이후 세계는 금본위제를 벗어났습니다.
오늘날 원화도, 달러도 금으로 교환해주는 화폐가 아닙니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금본위제가 사라진 뒤 한동안 금을 줄이던 중앙은행들이 이제는 다시 금을 늘리고 있습니다.
그 이유를 한 문장으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금은 더 이상 화폐의 기준은 아니지만, 여전히 국가의 준비자산을 분산시키는 독특한 실물자산이기 때문입니다.
특히 최근 중앙은행들이 중요하게 보는 것은 크게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 중앙은행이 금을 보유하는 이유 | 의미 |
|---|---|
| 준비자산 분산 | 특정 통화·자산에 대한 의존도 완화 |
| 신용위험 없음 | 발행자나 채무자의 상환에 의존하지 않음 |
| 위기 대응 | 금융·경제 위기에서 활용 가능한 자산 |
| 가치 저장 | 장기적인 준비자산으로 활용 |
다만 금에도 가격 변동성, 낮은 유동성 효율, 이자수익 부재 등의 단점이 있습니다. IMF 역시 금을 모든 준비자산의 대체재로 보아서는 안 되며, 특히 단기 유동성 목적의 준비자산과는 성격이 다르다고 평가합니다.
결국 중앙은행이 금을 사는 이유는 “금이 무조건 최고의 자산이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자산으로 쉽게 대체하기 어려운 특징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것이 정확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개인의 금 투자와도 중요한 차이가 있습니다.
중앙은행은 금을 단기 시세차익을 위한 상품이라기보다 국가의 장기적인 준비자산 포트폴리오의 한 부분으로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